분단이 만들어낸 슬픈 사랑얘기 - 길상사 (대원각)
백석과 김영한 여인과의 애틋한 사랑의 사연을 제대로 알기 전엔 그저 과거 화려했던 고급 요정
대원각을 불교계에 바쳤던 정도로 밖에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종원이 지은 여행스토리에서 서울의 가볼 곳 첫번째로 꼽은 이곳
백석과 김영한의 애달픈 사랑이야기의 배경을 안고 길상사가 탄생한 현장을 살피려고
2013.12.08(일) 삼선교에서 지하철을 내려 버스도 타지 않고 성북동 정겨운 길을 죽 걸어서
제법 먼거리에 있는 길상사를 찾아 올랐다.
강남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왔지만 강북의 한가운데인 이동네는 조용하게 옛모습을
잘 지키고 있어서인지 포근한 기분이 가득하다.
건물(40여동)의 가치는 평가액이 그리 많지 않겠지만 대지 7천여평의 가치가 대단하여 부동산 전체의 평가액은
천억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야 김영한은 "천억이 그 사람의 시 한줄만도 못하다"고 하여 백석과의 사랑이
이어지지 못한 허전한 심경을 그렇게 표현했었다고 한다.
대원각을 내놓았을때 김영한 여인은 자신이 죄 많은 여인이라고만 했다는데
누가 감히 그 분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지 ?
성서에 나오는 상황
예수께서 창녀를 가르키며 "누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라고 물었던것처럼....
여기도 분명 삼각산의 정기를 받은 사찰이어서 오늘 삼각산 아랫 부분만 더듬고 왔지만
삼각산 산행을 하고 온것이다.
대원각이 한참 시절 좋았을땐 저기 극락전에 이승의 극락처럼 주지육림속에 꽃다운 여인들의 가무로
웃음소리가 가득 했을것이다.
대원각은 70 ~80년대 삼청각 , 청운각과 더불어 국내 최대요정으로 호스티스 여인들만 200여명이 있던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곳이다
적묵당
진영각
청향당
길상선원
1999년 11월 13일 김영한 여인이 운명하기 하루전에 "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날 뿌려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겨 그해 12월 14일 눈많이 내렸던 날 법정스님께서 길상사 경내 곳곳에 김여인의 화장한 재를 뿌려주었다고 한다.
인간이 생을 마감하고 결국 돌아가는곳은 원래의 있던곳인 한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법정스님의
가르침대로 물질의 소유에 연연해서는 안될것이다.
저승가는 길에 입는 수의엔 넣어가지고 갈것이 없기에 호주머니가 없지 않는가......
미모와 함께 시 서 화에 능하며 문학적 재질을 갖춰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였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할 만큼 엘리트 여성이었던 김영한 여인에게 백석은 반해버렸다.
*자야 김영한 여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15세 꽃다운 처녀는 가난때문에 병약한 신랑에게 반강제로 시집을 갔는데 그녀가 빨래하러 간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죽은 뒤 시어머니의 매서운 시집살이와 남편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민하다가 집을 나와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가곡과 궁중무(춤)를 배워 차츰 서울 권번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선천적인 재주는 그녀의 인기를 더해 주었다.
그런데 23세때 흥사단에서 만난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유학을 떠났는데 스승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여 함흥감옥을 찾아 갔지만 끝내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백석시인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함흥 영생여고 영어선생님이셨던 백석(백기행)은 김영한여인에게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것이다" 라고 하였지만
세상사는 마음먹은대로 되질 않고 두사람은 여러 사연으로 절대 만날 수 없는 남북분단의 현실에
부닥치고 말아 그 한은 두사람 다 죽음을 맞을때까지 50여년간 계속 되었던 것이다.
* 백석의 부모님은 아들이 기생과의 사랑에 빠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혼인을 시켰는데 혼인첫날밤 백석은 신혼방을 빠져나와 영한을 찾아 함께 만주로 도망가자고 설득하지만 영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만다( 아마 영한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신은 천한 기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양반가의 자제인 백석은 양가집 규수를 맞이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라는 뜻 때문이었을거 같다.
사실 우리나라의 반상의 계급질서는 갑오경장(1894년)때 공식적으로 없앴다고 하나 천한 신분으로 백정 기생 무당 소리꾼 등은 해방이 지나고도 한참을 제대로 된 인간대접을 못받아 왔던게 사실이다.)
결국 백석은 방황하다가 홀로 만주로 떠나버렸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백석이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버린 뒤였는데 백석은 그녀를 잊지못해 서울로 가려 했지만 남북분단의 38선이 그어져 둘의 사랑은 이어지지 못했던것이다.
< 참고문헌 : 이종원 저 대한민국 숨겨진 여행지100 >
길상헌
지장전에서 바라본 길상사 경내
길상사 경내는 부지런하신 스님들이 많으셔서인지 어디든 깔끔하게 잘 정리정돈 되어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같은 방문객이 와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가지 못할것이다.
오늘은 낙엽이 다 져버린 뒤에 찾았지만 다음에 기회 있을때 녹음이 우거지는 철이나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철에
다시 찾아 보고 싶다.
범종각
설법전
정랑 ?
그림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을거여.....
정랑은 화장실을 의미하는 강원도지역 사투리라고 한다.
<이하 퍼온 글>
길상사는 본래 고급요정 ‘대원각’이었다. 80년대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요정으로 꼽히며 밀실정치에 이용됐던 곳이다.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1999)이 법정에게 시주해 절을 만들어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다. 16세때 조선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기생이 됐던 그는 대표적 근대시인 백석(1912~1995)의 연인이기도 했다. 백석에게 자야(子夜)라고 불리웠던 그는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냈다.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당시 시가 1000억원에 달했던 7000여평 절터와 전각을 내놓았다. 사양하는 법정스님을 10년에 걸쳐 설득해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97년 12월14일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 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만을 받았다. 수천 대중 앞에서 단 두 마디를 남겼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99년 11월14일 타계한 그는 하루 전날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다고 전해진다. 다비후 유골은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한편 ‘무소유’를 비롯 ‘버리고 떠나기’, ‘산에는 꽃이피네’ 등 대중서 20여권으로 깊은 울림을 남긴 법정스님은 한동안 길상사의 회주를 맡았다. 그외에는 그 흔한 사찰주지 한번 지내지 않으며 ‘무소유’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길상사에는 아직도 우리 가슴을 덥히는 창건 실화가 스며있다. 술과 노래가 흥건히 고여 있던 유곽이 청정도량으로 바뀐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마음속에 들어있음이었다. 현대 한국불교에서 우러난 비범한 이야기이다.
창건 실화 속에는 여인 김영한(1916~1999)이 있다. 시인 백석의 애인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다. 그녀의 삶을 더듬어본다.
서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지만 어느 날 집안이 몰락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선 권번(券番, 기생조합)에 들어갔다. 정악계의 대부 하규일(1867~1937)을 스승으로 모시고 진향이란 기명을 받았다. 진향은 함흥에서 교사들의 회식장소에 갔다가 시인 백석을 만났다. 첫눈에 반한 스물 여섯 백석이 스물 두 살 기생 진향에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백석은 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줬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왔다. 백석은 자야의 집에 머물며 시를 썼다. 1938년에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와의 사랑을 읊은 시였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슬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이하 생략)”
사랑은 뜨거웠지만 백석의 부모는 기생 출신 자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자야는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백석의 인생길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로 떠났다. 해방을 맞아 신의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한국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동강 난 나라 남과 북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백석을 그리며 또 기다리며 자야는 치열하게 살았다. 사업을 하고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면서 재물을 모으고 지식을 쌓았다. 모두 백석이 나타나면 그에게 바칠 것들이었다.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 일대를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열었다. 제3공화국에서 대원각은 정권실세들의 단골요정이었다.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허기진 마음은 지식으로도, 돈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격정의 세월은 흘러가고, 어느 날 자야 여사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다. 큰 감명을 받고 돌아보니 살아온 날들이 남루했다. 자신을 비우고 싶었다. 자야 여사는 법정 스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미국에 머물던 1987년, 자야 여사는 설법을 하러 온 법정 스님을 로스엔젤레스에서 처음 뵈었다. 그리고 대원각 건물과 부지를 법정 스님께 시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1000억원대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무소유’의 법정은 이를 간단히 뿌리쳤다. 이로부터 거의 10년 동안 승강이가 벌어졌다.
“제발 시주를 받아주세요. 스님.”
“시주를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보살님.”
그러다 결국 1995년 법정 스님은 김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대신 대원각의 전 재산을 개인 명의가 아닌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하게 했다. 쾌락과 술수, 관능과 음모가 술상 위에 질펀했던 밀실이 도량으로 바뀌는 대역사가 시작됐다. 대원각은 7000평이 넘는 숲속 부지에 40동의 건물이 있었다. 모든 건물에는 술과 고기 냄새가 배어있었다. 청정 일꾼(스님)들은 이를 가만가만 걷어냈다.
1997년 12월 14일 마침내 길상사가 개원했다. 김 할머니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려준 법정 스님은 보살 목에 108염주를 걸어주었다. 창건법회서 길상화 보살이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 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아픔과 슬픔을 넘어선 비원이었다. 보살의 소원은 참석자 모두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법회에 참석한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이 길상화에게 경배했다. 보살은 그 후에도 시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일인데 있는 것을 드렸으니 내세울 일이 아니네.”
“내 모든 재산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 못해.”
길상화 보살은 자신이 죽거든 눈 오는 날 자신의 유해를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고 당부했다. 연인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백석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길상화 보살은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비를 마친 유골은 유언대로 첫눈이 오는 날 길상사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날 길상사 도량이 순백으로 장엄됐다. 그것은 어지럽고도 아픈 과거를 덮는, 영혼이 재탄생하는 순백의 의식이었다. 태어나 부모에게 김영한이란 이름을, 기방 스승에게 진향이라는 기명을, 애인 백석에게는 자야라는 아호를, 그리고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다. 비록 김영한, 진향, 자야였으나 결국 길상화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법정 스님은 왜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였을까. 스님이 불일암을 등지고 강원도 오두막에 들었을 때였다.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라는 모임을 발족시켰다. “삭막하고 살벌한 현실에 향기로운 마음의 연꽃을 피워보자”는 취지의 시민운동이었다. 1994년 3월 출범한 모임은 소리 없이 번져나갔다. 전국에서, 각계에서 ‘맑고 향기롭게’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회원들은 모일 장소조차 없어 이 절 저 절을 전전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김영한 할머니의 청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했다. 마침내 법정 스님이 결심했다.
“시절인연이니 할 수 없구나.”
법정 스님은 개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며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개원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탄생했다. 그것은 “누구나 들어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길상화 보살의 염원이기도 했다. 스님은 창건 11주년에 이런 법문을 했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몸과 마음에 전율 같은 것을 느낍니다. 과연 제 자신이 맑고 향기롭게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합니다.”
법정 스님도 지상에서 마지막 밤을 길상사에서 보냈다. 투병 중이던 병원에서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길상사로 옮겨달라고 했다. 떠날 때가 된 것이었다. 스님은 한 번도 길상사에서는 자신의 몸을 뉘지 않았다. 법문이 있는 날에도 법회를 마치면 곧장 돌아갔다. 그런데 스님이 길상사를 찾았다. 스님은 길상사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입적했다. ‘덕’자가 들어간 문도들이 이를 지켜봤다.
길상사 설법전 앞에는 가녀린 모습의 관세음보살상이 서 있다. 성모상 조각가 최종태 교수가 빚은 것이다. 또 기독교 신자인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7층 석탑을 기증했다. 석탑은 법정 스님과 길상화 보살의 깊은 뜻을, 그리고 길상사가 종교화합의 상징적 공간임을 기리고 있다. 길상사 경내에는 수녀들과 목사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해마다 부활절에는 ‘작은형제 수도회’와 ‘성북동 성당’ 사람들이 달걀을 들고 나타난다. 12월이면 길상사에는 성탄절을 경축하는 현수막이 내걸린다.
길상사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자원봉사자들이다. 날마다 수백, 수천 명의 공양을 준비하는 보현회, 안내와 정랑 청소를 맡아하는 문수회, 죽은이를 돌보고 유족을 보듬는 지장회 등이 있다. 또 매주 목, 금요일에 결식 이웃을 위해 반찬을 만드는 귀한 손들이 있다. 봉사자들의 노란 앞치마가 꽃보다 곱다. 그들이 있어 길상사는 살아 움직인다. 맑고 향기롭다.
법정 스님이 떠나고 한 때 길상사에는 ‘욕심’ 논쟁이 일었다. 이를 일소하기 위해 2011년 2월 덕운 스님이 주지로 부임했다. 은사 스님처럼 은둔하며 선방을 지키던 덕운 스님에게는 느닷없는 감투였다. 이것 또한 시절인연이었다. 스님은 길상사에 드리워진 욕심과 의혹들을 걷어냈다. 스님은 모든 것이 법정 스님을 빼닮았다. 은사 스님의 말씀대로 길상사를 ‘맑고 향기롭게’ 가꿔가고 있다. 아직도 주지 자리가 어색하다. 하루 빨리 선방으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