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중산리)
서로 다른 이념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 당시엔 가난이 짓누르고 있던 시대라서 빨치산에 동조했던 무지한 대다수 백성들은 농사지을 땅을 무상으로 나눠주고 그저 등따시고 배부르게 해준다는 솔깃한 말에 이끌렸던 것이지 지금의 잣대로 말하는 공산주의 이념, 자유민주주의 이념, 이런것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였을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퇴로가 끊긴 인민군 2개 사단 병력이 이곳 지리산
골짜기 덕유산 골짜기 등 깊은 골짜기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지리산 주변마을 순박한 농민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두 세력 사이에 끼어 지독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군경편에 섰던 사람들은 차후에 평가를 받아 기록이라도 남길 수 있었지만,
좌익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죽었거나 살았어도 붉은 줄의 굴레가 씌워져 그림자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리산 자락 어디에도 빨치산의 영혼을 기억하는것은 하나도 없다.
패자의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경위 권상도
당시 경위계급이면 경찰간부이고 지방 경찰서에서는 서장 아래 과장급 보직을 맡은 분이다.
민족의 아픔,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한민족이면서도
서로 총칼을 겨누는 분단의 역사속에서
지리산은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현장이여
그 상처의 깊이만큼 잊어서는 안되는
전적지이다.
또 다른 전쟁이었던 이념의 대립
그로 인한 엄청난 희생
빨치산
그들이 지향한 이념과 민족적 의미는
과연 무었이었나 ?
불행한 역사속에서 비운에
쓰러져간 군경과 양민들의 죽음....
더 이상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하며
참혹한 전쟁의 교훈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역사의 장을 연다.
미제 M1소총과 소련제 따발총 사이에 있는 애를 안고 있는 아낙의 모습이 피곤해보인다.
소련제 76.2㎜ 곡사포
대공포
한국전쟁 당시에 미군과 국군이 사용 하였던 캘리버50 대공 기관포보다 좋아보인다.
해방과 빨치산
한국전쟁 전에도 일제의 학병 징집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 들었고
해방된 뒤 좌익활동 하던 사람들이 군경에 쫒겨 숨어들면서 빨치산이 탄생하게 된거다.
사진에 보이는 전신주가 특이하다.
「전신주 등의 통신시설에 빨치산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웅덩이를 파놓았으며 주민들에게 전신주를 할당하여 밤마다 지키도록 하였다.」
빨치산 즉 인민군 패잔병들이 소지 하였던 무기들
「빨치산의 아지트」
순두류 아지트, 법계사 아지트, 칼바위 아지트, 소막골 아지트, 중땀암반굴 아지트, 조개골 아지트, 등
「 빨치산들의 산생활 - 무기제조 방법 」
빨치산들은 토벌대가 후퇴할 때 버리고간 탄피를 주어다 벌어진 주둥이를 줄칼로 밀어 탄창에 맞게 다듬고 병기고에서 쏘아버린 뇌관을 빼내고 작은 망치로 살짝 살짝 때려가며 맞춘다.
그런 후 불발탄에서 빼낸 화약과 산에 있는 잼피나무를 태워 그 숯에서 뽑은 잿물과 섞어 만든 가루화약을 탄피속에 적당히 넣고 보급투쟁(약탈)에서 가져온 구리전선, 놋식기, 놋수저 등을 참나무숯에 녹여서, 진흙으로 만든 탄환틀에 부어 빼낸다. 만들어진 탄환은 병기고에 보관한다.
「빨치산의 난방형태」
천막칠 자리에 길다랗게 골을 파고 그 속에 모닥불을 피운 다음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젖은 발싸개를 말렸다.
불이 어지간히 타고나면 커다란 돌을 주어다가 골속에 채웠는데 돌이 달아서 밤중까지 식지 않았다.
그 위에 가지고 다니던 광목천막을 치고 양편에서 돌 위에 발을 올려놓고 두 줄로 누워잤다.
그러나 군 작전이 시작되면 불을 피울 수도 없거니와 항상 눈이 무릎을 넘는 고지나 북변 골짜기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골을 팔 도리도 없고 돌을 구할 방법도 없었다.
더욱이 천막 말뚝을 박을 수 조차 없어 눈을 발로 다지고 그 위에 청솔가지를 꺽어 깔고 누워자기도 하였다.
인민군 빨치산들이 사용하였던 약제 등
「낙오된 빨치산을 위한 비상선」
빨치산의 거점 간 연락은 소위 선이라 불리우는 도보 통신수단을 사용하였다. 이 선에서 유래되어 부대에서
낙오하거나 연락이 두절되면 비상함이라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미리 약속한 장소에 통신문을 묻어 놓으면 다른 편의 선요원이 그것을 찾아 가는 것이다.
아무리 갑자기 거점이 바뀌어도 이것으로써 연락이 끊기는 일이 없기때문에 비상함이라고 한다.
남부군에서는 이 비상함 방식을 비상선의 사전 약속없이 분산된 대원들을 재집결 시키는 장소를 알리는데도 이용하였다.
선점에 먼저 도착한 선요원은 약속된 대로 돌이나 나뭇가지로 선착 신호를 해놓고는 몸을 숨기고 기다린다. 후착한 다른편 선요원이 그 표지를 확인 후 돌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신호는 서로 얼굴을 모르는 선요원끼리 착오가 없도록 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위험에 대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시되어있는 탱크와 장갑차는
이곳 지리산 지역에서 활약했던 장비라고 보기는 어색하다.
산골짝에 숨어있는 빨치산을 토벌하는데 비행기와 대포 박격포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많이 봤지만 길도 나지 않은 산골을 누비며 탱크와 장갑차가 다녔으까?
당시 빨치산들이 발간했던 신문이나 정치학습 했던 서적 등 빨치산으로 부터 실제 빼았은 소지품 등이 전시품에 없다는 점이 아쉽다.
지리산은 수많은 인민군이 주둔했던터라 군복공장도 있었고 병원 심지어, 전기를 생산했던 작은 수력발전소도 가동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처절했던 생존기록은 오늘의 편리하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세대들의 상상력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