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와룡공원에서 창의문까지)
탐방일 : 2017. 11.18(토)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5년 1396년에 백악(북악),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높이 5~8미터 , 전체 길이 약 18.6 킬로미터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틈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서울 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2014년까지 한양도성 전체구간의 70%가 옛모습에 가깝게 정비되고 숙정문, 광희문, 혜화문은 다시 세워졌다.
출발지인 와룡공원에 세워진 한양도성 안내문
호젓한 오솔길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성곽길(와룡공원에서 말바위로로 가는 길)
멀리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이 보이고 아래로는 좋은 명당인 성북동이 내려다 보인다.
가을의 막바지에 찾아든 영하의 한겨울 추위와 강풍에 철모르고 피어났던 개나리가 잔뜩 움추러져 있다.
고급 요정의 대명사인 삼청각도 발아래로 보인다.
성곽의 밖인 북쪽편에서 바라본 숙정문
한양 도성의 북쪽 대문인 숙정문은 1976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숙정문은 통행이 금지되어 닫아 두었던 문인데 태종때 풍수가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그리 된거라고 한다.
처음에는 숙청문이었으나 후에 숙정문으로 바뀌었다.
현판의 글씨를 자세히 보면 힘이 넘치는 필체다.
촛대바위라는 명칭이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북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랜기간 조선 태조때1396년부터 일제에 강제 합방당한 1910년까지 성의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
청와대와 가까운 성곽 바깥쪽은 철망 울타리에다 CCTV 감시카메라가 곳곳에 있어 삼엄한 경계가 이뤄지고
있었다.
청운대는 역사적 사실과 별도로 연결 지을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냥 하나의 지점 표시일 뿐이다 라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기술되어 있다.
경사가 심한 고개를 올라와야만 북악(백악)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한양 주변의 산에 비하면 높지 않지만 광화문쪽에서 올려다 보면 뾰쪽하고 경사가 급해 보이는 산 정상이 쉽게 오르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의상봉 처럼 ~ ~
사실상 가장 높은 지점은 저 바위 위가 된다.
창의문에서 오르는 사람들은 북악산까지 단거리이고 경사는 더 심한 코스가 될 것이다.
한양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에겐 자하문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창의문
창의문 문루 아래로 수많은 선조들이 지나다녀서 바닥의 커다란 박석은 반들 반들 닳아 윤이 난다.
창의문 문루 바깥쪽으로 물을 빼내는 수구(수구)가 연잎모양으로 맵시있게 조각되어 있다.
수많은 선조들의 짚신 가죽신 말발굽에 닳아 바닥에 놓인 돌들이 반들 반들해 져있다.
정종수 경사 순직비는 최근(2017.06.05)에 세워진거다.
과거엔 최규식 종로서장님의 동상과 기념비만 있었던 곳인데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실은 계급의 높고 낮음을 구별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