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남도유람(나주)

흥렬 2018. 2. 15. 18:48

 

 

갔던날 : 2018.2.10(토)

 

나주(羅州)는  전남도청이 1896년 설치될 때까지 천년동안 남도의 중심도시 였으나 근래에 광주에 전남의 행정과 경제가 집중되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통일신라때는 금성군이었고 982년에  나주목으로 되었다.

지명이 주(州)로 된 곳은 다들 예전에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이 대부분이다.

 

경주, 상주,  진주, 전주, 나주 등

 

 

 

 

 

 

나무목 객사 금성관 외삼문인 망화루

 

금성관의 정문격인데 세칸규모의 2층 형태의 문루(門樓)

 

 

 

 

 

 

 

 

나주목을 호령하던 옛 선조들의 송덕비 등이 죽 늘어서 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의 중간에 있는 출입문인 중삼문(中三門)

 

 

 

 

금성관의 위용, 좌로 동익헌 우로 서익헌을 거느리고 좌정하고 있다.

 

금성관은 나주목사 이유인( 1487년4월 12일 ~ 1489년 재임 )이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다.

 

동익헌은 정3품(당상관) 이상의 관리가 묵었고 서익헌은 종3품(당하관) 이하의 관리가 묵었다.

 

 

 

 

 

금성관은 나주목 객사 공간인데 관찰사가 관할 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보던 곳이기도 하고

중앙에서  관리가 지방에 출장 나오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금성관의 동, 서익헌과 망화루(외삼문)는 일제때 없어졌으나 최근인 2004년~2008년에 복원하였다.

금성관은 일제때는 나주군청으로 사용하였고 1976년 해체 복원되었다.

 

 

 

 

 

 

동익헌(벽오헌)

 

나주목 객사의 동쪽에 있는 건물로 관찰사의 집무처와 중앙의 사신이 왔을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초 이 행 관찰사가 벽오동나무가 근처에 있어서 벽오헌(礕梧軒)이라고 이름지었다고한다.

 

근레에 복원된 건물이어서 좌측에 있는 금성관보다 훨씬 젊어보인다.

 

 

 

 

 

 

 

오랜 세월 이곳 나주의 역사를 다 살펴봤던 은행나무

 

 

 

 

 

금성관에서 바라본 중삼문과 외삼문

 

 

 

 

 

천년 목사고을 나주의 관아문인 정수루(정완루라고도 함)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년)에 나주목이 된 이래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나주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갈 때까지 긴 세월동안 남도의 중심도시였다.

 

 

正綏樓(정수루)라는 의미는 관아에 들어설 때 갓끈을 바르게 매고 의관을 정제하고 바른 몸가짐으로 이 문을 들어가라는 의미를 가진 문루이다.

 

과거엔 이문을 들어서면 나주관찰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목사의 관사격인 금학헌만 남아있다.

 

 

 

 

 

 

 

 

 

 

금학헌(琴鶴軒)은 조선시대 나주 목사의 살림집 즉 관사이다.

 

금학헌이란 뜻은 거문고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

 

나주에 남아있는 객사인 금성관, 정수루와 함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