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소재
조선 영조 52년 ( 1776년 ) 삼수부사를 지냉 유이주 어른이 지으신 조선시대 전통 양반가옥
운조루는 처음 100여 칸 정도의 규모였으나, 현재는 63칸 정도가 남아 있다.
넓은 대지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개방적으로 짓는 전라도 한옥과 높이를 강조한 경상도 한옥이 잘 조화를 이룬 건축이다. 영남 사람으로 호남에 뿌리내린 유이주의 삶이 녹아 있는 셈이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아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해 주었다. 운조루(雲鳥樓)의 집터를 '금가락지가 떨어진 모양'으로 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연지
집앞에 연못을 만들었던 연유는?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집앞으로 지리산에서 흘러온 맑은 계류가 흐른다.
커다란 통나무를 파서 만든 뒤주
그냥 카메라만 들이대고 대충 각도만 잡아 찍었는데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 한점 건졌다.
他 人 能 解
쌀 두가마니반이 들어가는 나무독에 쌀을 채워놓고 마을의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때울 수 없을 때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가 밥을 짓도록 허용한다는 뜻으로 쌀독의 마개에 타인능해라고 써놓았음.
우리 근현대사의 각종 민란, 동학, 여순반란사건, 육이오 한국전쟁 등의 힘든 역사의 시간을 지내오면서도 운조루가 지금껏 전통 양반가옥임에도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타인 능해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빈집이 아니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세대에겐 이러한 모습이 친숙하지만
아파트에서만 낳고 자란 어린 세대들은 생소한 한옥의 정경이다.
막걸리를 담아 솔잎마개를 해놓고 부뚜막에 놓아두었던 막걸리식초 제조용 독이 보인다.
하인들이 거처하던 행랑채가 꽤나 길고 크다.
기차 몇 량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긴 행랑채는 운조루가 한때 거대한 장원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집수리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하는 비용으로 천원의 적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운조루 주변에 산림욕장이 꾸며져 있음이 안내되고 있는데 지리산의 정기를 받은 금환락지의 길지를
다음 기회에 두루 살펴볼 기회를 갖기로 하고는
동지를 갓지난 짧은 하루가 석양을 만들고 있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운조루 유물전시관이 있다는 것만 보고 가는 발걸음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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