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 : 2017. 12. 23(토)
화성은 정조대왕 재위 13년만인 1789년 10월 7일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으로 옮기고 그곳에 있던 관아와 민가를 지금의 수원시 중심부에 있는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겼다.
이후 1793년 수원도호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고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화성이 축조되었다. 화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5.74㎞, 성벽높이 5가량이며, 여장의 높이는 약1.2m이다.
화성성역은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당시 사회 모든 분애에서 정조대왕을 정점으로 관료. 학자. 기술자. 백성들이 함께 만든 근대적 신도시이며 실학의 총체적 결정체이다.
화성은 정약용의 기본설계서인 『성설(城說)』에 기초하여 조선, 중국, 일본 성곽의 축성법 중 장점을 채택하였으며, 거중기, 녹로와 유형거 및 각종 수레 등 새로운 과학기기를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아울러 화성 축성에 대한 모든 내용을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보고서를 통해 상세하게 남겨 놓았다.
청설모의 귀여운 모습
수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팔달산의 수성약수터
병무청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팔달산의 서쪽 능선을 따라 오르다가 서암동문을 통해 서장대가 위치한 성곽으로 들어갔다.
국세공무원교육원과 중부지방국세청에서 10여년 가까이 근무했지만 화성 전부를 답사해 보질 못해 모처럼 성탄 연휴를 맞아 나섰다.
서장대(西將臺)
화성장대(華城將臺)
서포루
총구를 밖으로 향하게 하고 쏠수 있는 시설을 갖춘곳이다.
서삼치(西三雉)
화양루(華陽樓)
남문으로 가는 길
팔달산(八達山)은 수원 도심 한가운데 있지만 소나무숲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다.
남포루(南砲樓)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
고향의 봄을 작곡하신 홍난파 선생님의 노래비
역시 훌륭한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남문에 내려선 뒤 뒤돌아 본 팔달산 능선
고등학교 축구부 선수들이 계단을 뛰어 오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한계단씩 뛰어오른 것이 아니라 두계단을 뛰어 오르고 있었다.
옛적 순천고 체육 담당 김병옥 선생님 말씀처럼
세상에 가장 힘든것이 공부와 운동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 틀린거 없제.
수원 남문(팔달문)
정조대왕께서 화성축조 당시 기술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회식자리에서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는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시장 한복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서 드시는 술상이 무척 검소하다.
술잔과 술병 그리고 안주접시 하나 !
인간성을 느끼게 한다.
불취무귀
교육원에 5년간 근무하면서 남문시장에 와 조세범조사전문요원 과정의 교육수료를 앞두고 기념타올을 맞추고 지동시장에 가 머릿고기와 막걸리를 준비해 가지고 교육수료 파티를 하던 일들이 20년이 훨씬 지났다.
웅장한 모습의 수원제일교회
멀리 보이는 연무대
수원 사시는 분들은 대부분 동문이라고 부른다.
국궁(國弓) 사대(射臺)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연습용 활을 가지고 쏘아볼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방화수류정
서문(西門)
서문 주변에 있는 전통문화체험관
화성을 미니어쳐 처럼 잘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통상 북문이라고 부르는 장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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