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북경 여행(2일차 : 이화원 구경 15-9)

흥렬 2016. 11. 18. 21:21

 

 

이화원북경 서북부의 하이뎬 구에 위치한 황실의 정원 이자 궁전이다. 이화원이란 이름은 2차 아편전쟁으로 파괴된 궁을 1888년 서태후가 재건하면서 붙여졌으며 서태후는 1889년부터 죽을때까지 이곳 이화원에서 거주하였다.

 

 

 

이화원은 1924년에 공원으로 바뀌었는데 60m 높이의 만수산과 쿤밍호에 많은 공을 들여서 공사를 하였다. 이화원의 면적은 2.9평방킬로미터(약 90만평 규모)이고 이중에 3/4이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쿤밍호는 호수둘레 8킬로미터의 바다같은 모습의 호수로서,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다. 파낸 흙은 만수산이라는 인공산이 되었다

 

 

 

이화원 현판의 이 한자는 보통 잘 쓰지 않는 한자에 속한다.

 

한자 전체의 숫자는 5만자 정도 되지만 실제 생활에서 자주 쓰는것은 3천자 정도라고 한다. 한자는 각 개별 글자마다 고유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서 대단한 글자라고 여겨진다.

 

우리 문서나 교과서에도 어느정도의 한글과 한자 병기는 필요한 정책으로 생각되는데 특히나 법전(法典)에서는 한글만 써가지고는 제대로 취지가 전달되지 않는 사례도 허다 하다.

 

 

 

 

 

수성석(壽星石)

 

광서 12년(1886년)에 이화원을 재건할때에 묵이근원(현 북경대학교 안)에서 옮겨왔으며 색상이 푸르고 윤기가 나며 조형이 기이하여 마치 수성같아 수성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수전 건물은 서태후의 집무실이라고 보면 된다.

 

 

 

기린(麒麟)

 

건륭황제 연간에 주조한 것으로 모양이 기이하다. 용의 머리, 사자의 꼬리, 소의 발, 사슴의 뿔,  온몸은 인갑(비늘 껍질) 상태로서 전설속의 상서로운 짐승이며 악을 누르고 사악한것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이화원 정문에 도착하니 흐렸던 날씨가  조금씩 비를 뿌려대기 시작하여 미처 우산을 준비(차에 둔 여행가방에 있었음)하지 못해 일회용 비닐 우의를 입고 구경을 하였다.

 

 

 

 

 

 

청지수(靑芝岫)

 

패가석(敗家石) 이라고 불리우기도한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명나라 관료 미만종이 북경의 방산에서 영지모양과 비슷한 푸르고 빛이나는 거대한 돌을 발견했고 그 돌을 미씨작원(米氏勺園)으로 운반하는 도중 비용문제로 할수없이 교외에 버렸다.

 

그 후에 건륭황제가 거액을 지출하여 이곳으로 옮기고 '청지수'란 이름을 지었다. 이는 중국최대의 원림치석이다.

 

 

사진 윗부분 지붕위 황금색 표식은 이화원내의 많은 건물중 서태후가 거처하는 건물이라는 표식을 한것이라고 한다.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는 친구들.

 

 

곤명호(昆明湖)

 

중국식 발음으로는 쿤밍호,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서 바다를 보는거 같다.

항주에 있는 서호 역시도 그렇게 보였다.

 

곤명호는 이화원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화원 안에는 이러한 인공호수가 두개 더 있다고 한다.

 

겨울철에 이곳 호수가 얼어붙으면 거대한 스케이트장으로 변해 북경시민의 좋은 운동시설이 된다고 한다..

 

 

 

곤명호 안의 인공섬인 남호도(南湖島)를 연결해 주는 열일곱개의 아치형 받침대를 보여주고 있는

 017공교

 

사진을 찍었던 환경이 비가 내리고 어둠이 내리는 시각이어서 렌즈의 조리개를 최대로 열고 찍었어도 선명한 모습을 담지 못한것이 유감이다.

 

 

 

 

 

이화원 곤명호를 만드는 과정에서 파낸 흙을 쌓아 만들어진 인공산인 만수산 위 불향각(佛香閣) 

 

 

 

 

 

 

 

 

 

 

 

장랑(長廊)  중국식 발음은 창랑

 

장랑은 273칸 길이 778미터의 규모의 긴 복도라고 볼 수 있는데 서태후가 눈이나 비가 내리거나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이곳 기둥과 천정에 중국 고전문학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1만 4천여점의 회화로 장식된 건물이다.

 

 

서태후는 청나라 시절 두번의 수렴청정을 통해 절대권력을 쥐었던 여걸인데

처음에 호수를 파낼때 해군이 훈련할 인공호수를 만든다는 미명하에 공사를 벌였으나

 

차후에 그녀의 물놀이 정원이 되었으며 서태후는 74세까지의 장수를 누리는 동안 젊은 미소년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향락을 누렸고 그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는 비밀보장을 위해 줌음을 면치 못하였는데

 

서태후의 마지막 유언은 여자가 정치를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해서 오늘날 매우 혼란 스러운 우리의 현실과 비추어 한번 되새겨 볼 만한것 아닌가 싶다.

 

 

 

장랑의 바닥에 놓인 석재를 보면 아주 정교하게 고급재질의 돌을 이용하여 시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화원에 들어와 제대로 보려면 이틀 정도 걸린다는데 우린 조금만  보고서도 힘들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화원 구경하는 과정에서 황당사건 1호와 2호가 발생하였는데

 

 

1호는 위안화 네다바이 사건

 

2호는 국제미아발생 미수사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어서 구체적 사실관계는 차후에 논하기로 한다.

 

 

( 9부. 끝)